목록해외여행/튀르키예(터키) (38)
나의 산골이야기
구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아야 소피아는 537년 기독교 대성당으로 완공되어 15세기 이슬람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함락되기 전까지 1000년 동안 이어져 온 비잔틴 문화예술의 정수(精髓) 같은 건축물이다, 우선 아야 소피아에 들어서게되면 직경 30m가 넘는 원형 돔의 풍경에 압도당하게 되는데, 성경 속 성모마리아와 천사를 묘사한 그림과 이슬람 유일신 ‘알라’를 뜻하는 글귀가 한 공간에 어우러진 모습은 두 종교가 맞댄 경계가 어떠할지를 보여준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 사원(모스크)과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20년 7월, 다시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었다, 박물관을 모스크로 바꾸는 것은 이슬람교도들의 오랜 요구 사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세속주의적 정교분리 원칙을 ..
아야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 신성한 지혜(Holy Wisdom)을 의미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진 성당으로 비잔티움 양식과 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세계적인 건축물로 그 위대한 예술적 가치는 모자이크, 대리석 기둥, 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483-565, 재위 527-565)의 명령으로 세워진 유명한 돔은 비잔틴 건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1453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신생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당시에도 천년 고도였던 이곳을 함락하자마자 자신들의 새 수도로 삼았다, 그 덕분에 이..
보스포러스 해협은 튀르키예의 서부와 마르마라해, 그리고 흑해를 연결하는 해협으로, 터키의 위스퀴다르와 이스탄불 사이에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룬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로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해협의 항행권을 둘러싼 문제로 세계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지명은 그리스어로 '소가 건너간 나루터'라는 뜻이다. 암소로 변한 이오(Io)가 해협을 헤엄쳐서 건넜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라틴 어로는 보스포루스트라키우스(Bosporus Thracius)로 이는 예니칼레(yenikale) 해협과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길이는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이며, 고대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연..
부르사는 수많은 오스만 양식 건물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로, 셀주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 127곳, 술탄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 45곳, 상인들이 머물렀던 숙소 25곳, 대중 온천인 하맘 37곳, 공공 식당 14곳 등 역사적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스탄불에서 배를 이용하면 1시간 반,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2시간 17분이 걸린다, 부르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부르사 울루자미(Bursa Ulu Camii) 사원은 1399년 완공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당시 술탄이 건설을 지시한 모스크라고 한다, 또한 부르사는 아름다운 숲과 푸른 공원이 곳곳에 펼쳐져 있어 '그린 부르사'로 불린다고 하며,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울루(Uludağ) 산 스키 리조트가 유명하다고 한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뒤를 이어 튀르키예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부르사(Bursa)는 튀르키예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1326~1361년까지 오스만 투르크의 옛 수도로, 실크로드의 기착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이자 오스만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이다, 기원전 6세기의 페니키아 왕 부르사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면직물, 모직물 등 섬유 공업이 활발하고 융단, 비단 등이 옛날부터 유명하다고 한다, BC 3세기 말 비티니아왕 프루시아스에 의해 건립되어 프루사(Prusa)라 불렀으며, 로마·비잔틴 시대에 번영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2대 군주이며 초대 군주 오스만 1세의 아들인 오르한 왕의 묘가 있는데,1326년 오스만 제국 제2대 군주 요르한 베이가 취득한 후 1361년까지 이 나라 수도..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현재의 튀르키예 셀주크)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인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이 우..
에페소스의 역사는 킴메리족의 공격을 받았던 BC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부근의 마그네시아와는 달리 이곳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BC 6세기초 잠시 동안 참주들의 지배를 받았다. 결혼을 통해 리디아 왕실과 동맹관계를 맺었으나 에페소스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나 크로이소스는 아르테미세움(아르테미스 신전)을 새롭고 화려하게 재건하는 데 원주기둥들과 금 몇 개를 하사하기도 했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이당시부터 에페소스인들이 평야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아테네인 아리스타르코스가 만들었던 법률을 고쳐 썼다고 한다. 그후 얼마 안 있어 페르시아의 키루스에게 정복당했다. 이오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BC 499~493) 초기에 이곳은 이오니아인..
에페소스는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세워진 도시로서 에게 해로부터는 약 6.5km 떨어져 있었다. 에페소스는 신약 시대에 로마제국의 도시들 가운데 손꼽힐 정도로 큰 도시로서 소아시아에서 정치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주재 로마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에페소스는 또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 활동과 관련해서도 큰 의미를 지닌 도시이다. 에페소스라는 도시가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에페소스는 기원전 1044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정복으로 20개 도시로 구성된 이오니아 동맹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이 도시는 차례로 리디아 , 페르시아 , 그리스 ,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에페소스는 해양 무역을 하..
고대 문명의 도시 에페소스에 가기 전에 옵션 중의 하나인 로마 유적지에 방문하기 위해 어느 마을에 들렀는데, 나는 옵션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였다, 산책하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모스크에 들어갔더니, 터키 학생들이 여행을 왔는지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발을 씻으며 떠들썩하게 이야기한다, 예전에 터키에 왔을 때, 가이드가 한 말이 생각난다, 터키 남자는 말이 많은데, 특히 차를 마시면서 수다떠는 것을 매우 좋아한단다, 그래서 홍차 4~5잔 마시는 것은 기본이란다, 또 다른 이슬람 국가와 달리 술, 담배가 자유로워서 정부에서 허가 받은 곳에서 술과 담배를 판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지는 모르겠으나 가는 여행지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다른 이슬람..
파묵칼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와인의 고장으로 유명한 시린제 마을을 방문하였다, 셀추크로부터 9km 떨어진 산 위에 펼쳐져 있는 시린제 마을은 에페소스(Ephesos)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15세기 무렵에 이주해 형성한 마을로, 터키 속의 작은 그리스 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래서 시린제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스풍으로 꾸며져 있고,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마을의 모든 건물이 흰 외벽에 붉은 기와 지붕을 하고 있다, 현재 주민은 약 600명 정도이며, 마을 자체가 아담하고 예뻐서 관광객들 사이에 예쁜 마을로 입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비탈진 길 옆으로 아기자기한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돌을 타일식으로 반질반질하게 깔아놓은 길바닥도 운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