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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23)

영혼의 수도자 2024. 11. 3. 04:38

피렌체는 기원전 8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아르노 강가에 자신의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를 세울 때 "두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플루엔티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명칭이 후에 "플로렌티아"로 바뀌었다. 그러나 술라의 퇴역병들은 곧 도시를 방기하여 이때의 식민지 건설은 실패했고,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로 퇴역병을 이주시켜 건설한 것이 현재 피렌체의 시작이다. 이후 피렌체는 4세기 초 주교좌가 되었고 서로마제국 멸망과 10세기를 거쳤다.

11세기부터 상업과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국력이 발전, 몰락한 항구 도시 피사를 내륙 도시인 자신들의 외항으로 접수하고,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이탈리아의 곡물 무역권을 얻어내며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152년 도시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3세기에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중 누구 편을 들 것인가를 두고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양 집단이 사실상의 내전을 벌였다. 이후로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정치 방식이 본래의 코무네(Commune, 지방 자치)에서 점차 한 가문의 지도자가 "시뇨리아(Signoria)"라는 칭호를 달고 지배하는 구도로 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여러 유력가문이 정쟁을 벌이다 1434년부터 메디치 가문이 완전히 정계를 장악했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지배 시기는 사실상 피렌체의 최전성기로, 메디치 가의 강력한 후원 덕에 무수한 학자와 예술인의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메디치 가가 자랑하는 정예군 검은 군단(Bande Nere) 등의 강력한 군사력 또한 위용을 뽐냈다. 더구나 이 시기는 피렌체뿐 아니라 인근의 밀라노, 제노바, 베네치아 등 북이탈리아 전체가 흑사병을 견뎌낸 이후의 산업의 호황과 각지에서 몰려든 인재들의 역량에 힘입어 눈부신 발전상을 구가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북쪽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내부를 추스르고 강대국으로 변모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피렌체를 포함해 각 도시국가별로 제각각 방위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유럽 본토의 상황이 혼란스러웠으나, 그 양상이 두 강대국 체제로 정리되면서 불똥은 사이에 낀 이탈리아로 옮겨 붙었다. 초기에는 그래도 양국에 적당히 옮겨 붙으며 실리를 취할 수 있었으나,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 저지대 국가를 필두로 서유럽을 아우르는 유럽 최대 패자로 부상하면서 힘의 균형이 완전히 기울어진다.

이에 당황한 메디치 가문은 카를 5세를 견제하고자 프랑스 편에 붙었으나, 양측이 전면적으로 격돌한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에 증원해 준 검은 군단이 카를 5세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꺾은 카를 5세는 로마까지 침공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적대 세력을 완전히 찍어 눌렀고, 즉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복귀시켰다.

 

하지만 교황과 화해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을 복위시켰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나중에 앙리 2세로 즉위하는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 왕자에게 정략적으로 시집 보낸 보람도 없이 상공업마저 독일 산업권에 많이 빼앗겨 피렌체도 메디치 가문과 함께 몰락,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계속 피렌체 공국의 주인으로 남았고 오히려 주변 지역들을 흡수하여 1569년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웠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이 끝내 단절되자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지방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에트루리아 왕국에 병합되어 파르마 공국을 빼앗긴 부르봉-파르마 가문이 들어서고, 페르디난도 3세는 잘츠부르크를 거쳐 뷔르츠부르크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빈 체제가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복권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벌어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손잡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개입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토스카나 주민들의 봉기로 합스부르크 가문을 몰아냈고,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 (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구성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류하였다. 

 

1865년 잠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871년 수도의 지위를 로마에 내어 준 후 현재에 이른다. 그래도 잠시 수도로 있을 때에 구축된 인프라 덕분에, 단순한 지방도시로 남을 뻔한 이곳이 관광도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북이탈리아에서 영국군과 싸우던 독일 국방군은 피렌체에서 퇴각하면서 모든 다리를 끊으려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베키오 다리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포격을 거의 받지 않은 도시라 다행스럽게도 많은 문화유적들이 온전한 채로 남을 수 있었다. 

1966년 11월 아르노 강이 범람하면서 많은 문화 유적, 유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은 오랜 기간 동안의 작업을 거쳐 복원에 성공하였으나 일부는 영원히 소실되었다.

현재 인구는 38만여 명으로, 거대한 돔을 가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우피치 미술관 등이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관광 도시다.

 

                                                                                                                                     - 나무위키백과사전 인용 - 

 

 

우피치 미술관,,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배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그들의 미술품 컬렉션은 마지막 메디치 가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상의를 한 끝에 피렌체 시에 기부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최초의 현대적 박물관 중 하나이며, 1765년에는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고, 1865년에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

베키오 다리,,아르노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고 다리 위에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최초의 대형 성당이었고, 피렌체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당 시설이다, 이 성당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고딕 미술과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이다,